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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챕터 1

[챕터 1] 희망이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관 - 일상편 : 4

단간론파 Dan은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 및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점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단간론파 Dan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주인공 및 캐릭터들의 속마음 및 생각 등의 부분에서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많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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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간론파 Dan
<챕터 1>
희망이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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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선지 처음이지만 큰 기시감이 느껴진다.
키보가미네 학원 자체는 살면서 여러 번 들어봤지만, 이런 곳은 다른 이들의 지나가는 이야기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곳이 키보가미네 학원이라는 모노젠틀의 말은 거짓말인 것처럼 보인다.
어째서 다른 초고교급 학생들이 아닌 우리들을 이런 게임에 참가시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내겠다는 최소한의 계약인 구두계약도 체결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냥 제일 손이 가는 초고교급 16명만 납치했다거나, 혹은 나 그리고 다른 애들 또한 계약을 체결하고도 기억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카하시 아리이치: 야 너 뭐하냐?


천진만난한 목소리가 귀에 흘러 들어온다.


: ···

카하시 아리이치: 어이! 내 말 안 들리냐?
 
 
댄서가 내 눈 앞에서 팔을 흔들며 나의 시야를 방해한다.


: ··· 뭐야.

카하시 아리이치: 잘 들리면서 안 들리는 척은,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

: 딱히. 신세한탄.

카하시 아리이치: 신세한탄이라... 그래, 지금 우리 신세가 물 빠진 생쥐보다 더하긴 하지. 이게 뭐냐고 지금!


댄서는 괜한 화풀이를 하며 바닥의 인공잔디를 걷어찬다.


카 미오리: 그런 화풀이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징징거리지 말도록.

카하시 아리이치: 누가 모르냐고 알고 있거든? 에이씨 그냥 빨리 조사나 하자.


댄서는 본인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 투덜거린다.


: 뭐가 그렇게 급해?

카하시 아리이치: 어색해 죽겠어! 하필 남자가 나 뿐이어서 편하게 대화 할 대상도 없잖아. 하다못해 마즈키 정도는 있어야 되는데 염병할. 어색한 게 제일 싫다고!
 
 
댄서는 자신의 모자를 벗더니 괜한 신경질을 내며 자신의 머리를 만진다.
사람마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
저 댄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싫어하는 듯하다.
어색함도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지만 저 댄서가 싫어하는 것은 다른 이와의 친밀감과 유대감 즉, 자신과의 공통분모가 없을 때 생기는 어색함이 싫은 것이다.
 

즈마키 하로: 혹시 저희는 별로인 건가요?


호텔리어는 댄서의 그 말에 약간 주눅 든 것 같이 보인다.
 
 
카하시 아리이치: ··· 어...
 

그 말에 댄서는 약간 얼빠져 할 말을 찾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조각상이 된 듯 얼어붙었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는 듯 하다.


카하시 아리이치: 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남자 1명쯤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 라는 그런... 어찌 말할수록 변명이 되어 가는 것 같냐.

카 미오리: 변명이 맞으니깐 그런 거다.

카하시 아리이치: 그래 너 잘났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볼까? 할 게 태산이야.
 
 
댄서가 그렇게 말 함과 동시에 목과 손을 비틀어 뚜둑 소리를 낸다.
제대로 조사에 임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즈마키 하로: 워낙 넓으니깐 구역을 나눠서 조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여요.

카하시 아리이치: 모노젠틀이 꼴에 꾸민답시고 타일에 벤치까지 깔면서 꾸며가지고 볼 게 더 많아졌어.

카 미오리: 장기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없이 잔디만 있는 평야보단 뭐라도 있는 편이 훨씬 낫다.
 
: 워낙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수치인 것 같은데? 지도를 봐.
 
 
나의 전자 학생 수첩에서 지도를 켜 다른 애들에게까지 보여준다.

 
카하시 아리이치: ··· 시발 존나 크네...
 
즈마키 하로: 저 정도면 어느정도 일까요?

카하시 아리이치: 어... 체육관 가로 길이보다 몇 배는 기니깐. 100미터 정도?

즈마키 하로: 네? 그 정도나 된다고요?

카하시 아리이치: 아님 말고. 내가 거리감각은 없어서.


댄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카 미오리: 체육관의 가로 길이가 약 15M 정도였으니 대충 어림 잡아도 50M이다. 약 아파트 17층 높이이다.
 
카하시 아리이치: 넌 그걸 또 어떻게 잰거야?
 
카 미오리: 정확한 식은 아니다만 '본인의 키-1M = 본인의 보폭' 이기에 쉽게 구할 수 있다. 25보 였으니 15미터에 가깝다.

카하시 아리이치: 너 키가 몇인데? 160? 161?

카 미오리: 162cm이다.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카하시 아리이치: 161이나 162나 그게 그거지.

카 미오리: 그럼 169cm와 170cm도 거기서 거기인가?

카하시 아리이치: 그건 아니지 169와 170에는 큰 벽이 있다고. 누가 본인 키를 169라 그러냐 거의 다 170이라 하지.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키를 비교당하며 자란다.
초등학생 때부터 키 순으로 활동을 정하기도 하며 밖에서 보는 키가 큰 사람들이 주는 알 수 없는 압박감과 든든함이 있다.
그래서 키가 작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박혀있다.
때로는 자신을 포장하는 능력도 매우 중요하다고 누군가가 말하기도 한다.


카 미오리: 어찌됐든 그런 식으로도 크기를 잴 때가 종종 있다.
 
: 50미터면 그렇게 큰 편은 아니네.

즈마키 하로: 전 걷는 것은 익숙해서 괜찮겠지만 여러분들이 걱정되네요.


호텔리어는 괜한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부정적인 생각과 괜한 걱정들로 인해 마음이 괴롭고, 아니 마음을 괴롭힐 때가 있다.
그런 걱정은 다른 사람들도 불편하게 하고 말하는 본인도 불편하게 만드는 '무례함'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배려 해준다고 좋아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카하시 아리이치: 아니 썅 다시 봐도 존나 크네. 심상치 않다 생각은 했는데, 모노젠틀 양반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요. 이럴거면 다른데 조사했지.
 
 
댄서는 역정을 내며 또 다시 투덜거린다.
야외의 크기는 아까까지 있었던 본관보다 최소로 어림 잡아도 5배 정도는 커보인다.
크기가 크다고 조사해야 할 것이 많은 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공간을 단 4명이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고된 작업인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크기, 즉 사이즈가 크다는 편향적인 단어가 주는 압박감 자체가 상당하다.
 
평균으로부터 벗어난 예상외의 크기를 마주하는 것만큼 인상적인 경험도 없을 것이다.
이때 크기의 양극단 중 작은 쪽보다는 큰 쪽을 마주할 때 인간은 더욱 압도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더 큰 대상을 마주할 때 자주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끼지만, 작은 대상을 마주할 때는 이런 감정을 잘 느끼지 않음은 경험적으로도 자명하다.
 
 
카 미오리: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저것이다.
 
 
감독은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더니 저 멀리 있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즈마키 하로: 투명한 유리 같은 막 같은 거 말하시는 거죠?
 
카 미오리: 그렇다. 저것의 정체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저건 절대 평범한 유리가 아니다.

카하시 아리이치: 과연 그럴지 아닐지는 붙어봐야 알겠지. 오케이, 그럼 이번 목표는 저거다!


댄서는 우리를 앞질러 타일 길을 따라 먼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시야에서 댄서는 점점 작아져만 간다.


즈마키 하로: 그래도 분위기가 어색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


···
나와 감독은 그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부는 바람 또한 멈추듯이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즈마키 하로: ··· 방금 한 말 취소할게요...

카 미오리: 지금 뭐라 했었나? 생각하느라 못 들었다.

즈마키 하로: 아니에요... 아무것도...

: 분위기가 어색해지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었어.

즈마키 하로: 앗 그걸..!

: 왜? 말하면 안되는 거였나?


잠시 내가 뭔가를 잘못 말한 건가 싶다.
대답을 회피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한 것인데 말이다.
이상한 질문도 아니었고 당연히 할 수 있는 질문인데 대답을 망설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카 미오리: 그나마 분위기 메이커라도 있으니 이 정도의 분위기인 것이다. 그 녀석 덕에 가벼워 보이더라도 간단한 말은 할 수 있는 정도의 말문이 틔인 것이다.


감독은 본인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투영한다.


즈마키 하로: 네 정말 다행이에요.

카 미오리: 할 말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해도 좋다. 기본적인 생각은 하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감독은 자연스럽게 나를 바라본다.
정확히는 바라봤다기 보다는 노려봤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아마도 나에게 하는 말이겠다 싶다.


카하시 아리이치: 야!! 걸즈 토크는 그쯤하고 빨랑 오지 그래!


댄서가 우리를 향해 목청이 터질 듯이 소리친다.
어느샌가 구의 벽면에 도달해 있던 것이다.


카 미오리: 이런. 잠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감독은 댄서의 그 말을 들었음에도 뛰어가기는 커녕 여유롭게 걸어가기 시작한다.


카하시 아리이치: 야! 굼벵이냐! 기어오지 말고 뛰어오라고!
 
카 미오리: ···
 
 
감독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앞으로 걸어간다.
이에 뒤쳐질세라 호텔리어와 나도 보통 걸음걸이보다는 빠르게 댄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당연히 먼저 출발한 감독을 앞지를 직전이다
그 전에 나는 감독에게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조금만 더 빨리 갈 수 없겠냐는 무언의 압박과 눈치를 주는 것이다.
 
감독의 얼굴을 바라보니 뭔가가 보인다.
매우 바쁘게 눈을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감독의 모습을 말이다.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눈으로 훌어보며 살펴본다기에는 강박 수준으로 빠르고 긴박하다고 느껴질 수준이다.
마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것처럼 말이다.
 
 
카 미오리: 흠?
 
 
결국 감독의 시야와 나의 시야가 마주친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감독은 놀라는 기색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너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카 미오리: 할 말이 있는 건가?
 
: 너 지금 불안해?
 
 
나는 걷는 속도를 낮춰 감독과 비슷하게 걷기 시작한다.
 
 
카 미오리: 불안하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 모르는 척 하지마. 다 본 거 아니까.
 
카 미오리: 딱히 불안한 것은 없다.그저 내 오랜 버릇, 아니 강박 중 하나다. 이상하게 생각하려면 해도 된다.
 
: ···
 
 
좀 더 캐물어도 되겠지만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보통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구나 작게 혹은 크게 강박이라는 증상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감독의 강박은 다른 강박과는 비교된다.
다른이들은 강박에 스트레스 받으며 이겨본 적도 없는 강박에게서 승리해 보려고 한다.
소수는 그 강박과 싸워 승리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와 비교되게 저 감독은 이 강박 같은 버릇을 고치고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만의 하나의 강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감독이라는 재능과 잘 맞아떨어진 강박이라고 할 수 있다.
 
 
카하시 아리이치: 시팔 너희 안 와!? 걸즈토크는 나중에 하라고!!
 
 
댄서는 참다못해 담고 있던 분노가 터지며 우리에게 역정을 낸다.
목청이 얼마나 큰지 멀리 있는데도 귀가 아파질 정도이다.
 
 
즈마키 하로: 두 분 다 빨리 오세요!
 
 
호텔리어도 구의 벽면에 도착해서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다.
 
 
카 미오리: 얘기 끝났으면 빨리 걸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감독은 이제서야 발에 속력을 더하기 시작한다.
나 또한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쉬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속력을 내기 위한 것보다는 한숨에 가깝다.
댄서는 보는 이나 듣는 이로 하여금 다른 이를 피곤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카하시 아리이치: 너네 왜 이렇게 늦게 와? 빨랑빨랑 오라니깐.
 
카 미오리: 이 유리벽 뭔가 심상치 않다.


감독이 또다시 바쁘게 눈을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말한다.

 
카하시 아리이치: 야 내 말 씹냐?
 
: 딱히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즈마키 하로: 저도 반짝인다는 것 빼고는 잘...
 
카하시 아리이치: 야! 내 말 안 들리냐고! 내가 병풍이야?

카 미오리: 조용히 하고 살펴보기나 해라. 집중력이 흐트려진다.

카하시 아리이치: 참나, 아니 이까짓 유리가 뭐가 대수라고..!

: 야, 너 뭐하는...


(쿵-!)

댄서는 옷의 팔을 걷더니 온 힘을 다해 유리벽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둔탁한 소리가 주위에 울려퍼지며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댄서를 지켜보고만 있다.


카하시 아리이치: ···

카 미오리: 역시 이 정도로는 끄덕도 없는 것 같다.

즈마키 하로: 아리이치 씨..? 괜찮으세요?

카하시 아리이치: ···


댄서는 유리벽에서 주먹을 떼지 못한 채 가만히 서있을 뿐이다.


: 그러게 누가 그런 짓 하래? 괜히 긁혀가지고...


댄서한테 한마디를 하고 있을 때 유리벽을 향해 뻗고 있던 댄서의 팔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그 떨림은 점점 심해지더니 지진이 일어났던 것만 같다.


즈마키 하로: 아리이치 씨! 말 좀 해보세요!

카하시 아리이치: ··· 아.. 아악!!! 존나 아프네 시팔!!!


댄서가 바닥에 주저 앉으면서 본인의 오른팔을 왼팔로 감싼다.
입에서 험한 욕설이 터져나온다.


즈마키 하로: 어머 보건실, 보건실로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부러진 것 같아요!

카하시 아리이치: 아... 내 오른손에 흑염룡이..!

: 헛소리 하는 거 보니깐 괜찮은 것 같은데.

카하시 아리이치: 이제는 내가 헛소리 하는게 디폴트냐? 아오 존나 아프네 진짜.
 

댄서는 얼굴을 바닥에 처박으며 고통의 신음소리를 낸다.


카 미오리: 아프긴 하겠다만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바닥에 주저 앉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카하시 아리이치: 너 T발 C야? 그럼 너가 해 봐! 얼마나 아픈지!

카 미오리: 싫다. 만약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 오히려 깨지면 더 위험하지. 파편들 때문에 너 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칠텐데? 말이나 행동에 생각을 좀 하지 그래?


나는 감독이 했던 말을 댄서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각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된 사용방법을 모른다.
어떤 생각을 우선시하고 강도 있게 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천치만별이다.
생각은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각은 의도적으로 훈련 될 수 있다.
어떤 생각을 어떤 강도로 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생각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성공한 삶을 살 수도, 실패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초고교급'이라는 것도 그렇다.
많은 노력과 영리한 생각, 그리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시행력을 동반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갖추고 있지 못한다면 초고교급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나의 재능도 알지 못하기에 영리하게 생각하고 멍청하게 행동한다.


카하시 아리이치: ··· 알았어. 미안해... 근데 아직 억울한 게 하나 있어!


댄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본인의 옷에 묻은 인공잔디와 흙을 턴다.


카 미오리: 또 다른 문제점이 있나?

카하시 아리이치: 내가 아팠던 건 호들갑이 아니야. 진짜 존나 아팠다고!

카 미오리: 예를 들자면 어떤 느낌을 말하는 것인가?

카하시 아리이치: 어... 마치 내가 때린 충격을 '반사' 하는 느낌? 그 느낌이 있잖아. 이 정도의 힘으로 때리면 이 정도로 아프겠다 라는 느낌. 때리는 본인은 알잖아.

: 잘 모르겠는데?

즈마키 하로: 저도 잘 공감은 안가네요...

카하시 아리이치: ? 또 나만 이상한 놈 되는거야? 아따 돌겠네 이거.

카 미오리: 일단 무슨 느낌 인지는 알겠다. 분명 이 유리벽은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 주먹으로 온 힘을 다하여 때렸는데도 어떠한 잔상도 남지 않았다.


감독은 유리벽의 코앞까지 다가가 발로 약하게 벽을 걷어찬다.


카 미오리: ···


감독이 본인의 발을 빤히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빠진다.


카 미오리: 확실히 이상하다. 마치 이 유리벽의 뒷편에서 나와 똑같은 인간이 똑같은 힘으로 똑같은 곳을 때리고 있는 것 같다.

카하시 아리이치: 봐봐! 내 말 맞지! 휴 하마터면 억울 할 뻔.

: 이제는 안 아프냐? 아깐 아파보이더니.

카하시 아리이치: 아니 아프지. 오른손을 봐봐. 파랗게 멍 들었잖아.

즈마키 하로: 보건실에서 치료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보기만 해도 아파 보이는데.

카하시 아리이치: 됐어. 이 정도는 참아야지. 약과야 이 정도면.


댄서가 괜찮다는 듯이 말했지만 오른손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푸르게 멍든 손은 보는이로 하여금 고통을 대신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하며, 떨리는 댄서의 오른팔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모노: 오호!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조사는 잘 되고 있습니까?


모노젠틀이 재수 없는 목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까와는 다르게 좀 더 가벼운 행동거지를 보인다.


모노: 이 유리벽을 처음 봤을 땐 저도 무척이나 놀랐...

카하시 아리이치: 야 꺼져.

모노: 아니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이래뵈도 학원장인 저한테 예의가 없으십니다.

카하시 아리이치: 학원장은 개뿔 엿이나 쳐먹어. 기분 더러우니깐.

모노: 아니 왜 저한테 화풀이 하십니까.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즈마키 하로: 혹시 어째서 왔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모노: 그럼요. 지금 여러분들 앞에 있는 이 벽은 '정의의 벽' 입니다.

카하시 아리이치: 뭐냐 그 애니에서 나올 것 같은 네이밍은.

모노: 이 학원의 정의 그 자체인 저 모노젠틀의...

카 미오리: 그딴 건 궁금하지 않다. 본론만 말 할 수 있도록. 그게 본론은 아니지 않은가?

모노: ··· 거 참... 알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벽은 평범한 유리벽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하는 충격을 흡수 및 반사하는 유리벽입니다.

: 그건 알고 있는거고 다른 건?

모노: 사람, 아니 AI가 말하는데 말 좀 끊지 마십쇼. 이 유리벽은 여러분들이 어떤 짓을 하던 무슨일이 있어도 부숴지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모노: 그걸 알려드릴 수는 없죠. 영업비밀이라고나 할까요? 저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즈마키 하로: 마치 영업사원 되신 듯이 말씀하시네요.

카하시 아리이치: 그럼 이게 강화 유리라도 된다는거냐?

카 미오리: 강화 유리는 만능이 아니다. 작은 면적의 충격엔 터무니없이 약한 것이 강화 유리이다.

카하시 아리이치: 작은 면적의 충격엔 약하다고? 영화에서는 총알 쏴도 안 깨지던데?

카 미오리: 그건 강화 유리가 아닌 방탄 유리이다. 둘이 엄연히 다르다.

카하시 아리이치: 아~ 그런거였어?


댄서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즈마키 하로: 그럼 망치 같은 물건으로 부순다면 나갈 수 있는걸까요?

: 그렇게 허술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모노: 후후후 글쎄요? 궁금하시다면 시도해봐도 나쁠 건 없겠죠.


모노젠틀의 가면 뒤에 기분 나쁜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흘러 나온다.


카하시 아리이치: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해? 꼴보기 싫게.

모노: 전 딱히 학생 여러분들의 행동을 제한하거나 제재하지 않습니다. 행위자가 그 행동에 책임만 진다면 말입니다. 여러분들의 발버둥 항상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나지막한 한 마디를 끝으로 모노젠틀은 사라진다.
만화 같은 곳에서 허구적으로 표현되는 사라짐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카하시 아리이치: 하 은근 사람 성깔을 건들 줄 아네. 오케이 누가 이기나보자. 야 오함마 가져와! 부숴버리게. 아.. 아..!


댄서는 괜히 부상을 입은 오른손을 쎄게 쥐었다가 고통을 호소한다.


카 미오리: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금하도록. 너의 가장 큰 단점이다.

: 아까 오른팔 부상 입어 놓고는 또 뭔 짓을 하게.


나는 댄서의 오른손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오른손의 부상이 심각해 보인다.
검지와 중지, 약지와 소지까지 크고 작은 멍 자국이 보인다.


카하시 아리이치: ···


댄서가 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본인의 오른팔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는다.


즈마키 하로: 혹시 많이 아프시면 보건실에 같이 가드릴 수도 있는데

카하시 아리이치: 아니 괜찮아. ··· 아니, 사실 안 괜찮은데 조사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즈마키 하로: 많이 아프시면 다녀오셔도...

카하시 아리이치: 됐어. 나중에 가면 되지. 다른 곳부터 살펴보자.

카 미오리: 고통이 심해지면 언제든지 말해라. 방치하여 악화되는 것만큼...

카하시 아리이치: 아이씨! 알겠다고! 잔소리 좀 그만해!

카 미오리: ··· 알았다.


댄서는 귀를 막으며 감독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댄서를 보며 감독은 깊은 한숨과 함께 그를 내버려 두기로 한다.
감독의 입장에서는 분명 좋은 조언을 해줬는데, 댄서는 부정적인 태도로 듣는 둥 마는 둥 하거나 고의로 조언을 무시하고 있다.

조언이 얼마나 좋은 내용인지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사람이 나에게 들을 준비가 되어있냐는 것이다.
아무리 자세가 안되어있다 한들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준 것인데 그저 답답해 할 뿐이다.


즈마키 하로: 그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조사해보는게 어떨까요?

카 미오리: 일단 벽 주위를 1바퀴 쭉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카하시 아리이치: 귀찮은데 그냥 볼 곳만 딱 보고 딱 들어가면 안돼? 딱히 볼만한게 체육관 외관이랑 본관 외관 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 확실히 4명이서 조사하는 건 효율이 떨어져.

카 미오리: 그럼 인원을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명은 벽 주위를 1바퀴 돌고, 나머지 2명은 건물들 외관을 조사하는 것이다.

즈마키 하로: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카하시 아리이치: 오케이 그럼 인원 나누자. 건물 외관 조사하겠다 손, 일단 나부터.


댄서가 왼손을 들어 의사를 표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의사에 대답하지 않는다.


즈마키 하로: 혹시 제가 같이 동행해도 괜찮으실까요?

카하시 아리이치: 뭘 동의를 구해 당연히 오케이지.

카 미오리: 그럼 각자 조사하고 발견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부르고 보고하도록 해라.

카하시 아리이치: 좋았어! 이대로 주저 앉을 순 없지.

즈마키 하로: 분명히 이곳에서 나갈 증거가 있을거에요!


감독의 말에 나를 제외한 두명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한다.


: ···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더 이상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다른 것보다 긍정보다는 부정으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싶을 뿐이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사고와 지나치게 부정적인 사고는 모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현실 대신 환상을 받아들인다.
이 세상은 긍정적인 일과 부정적인 일이, 기쁨과 슬픔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험에 대해 충분히 예상하고 대비하는 '방어적 비관주의'가 필요하다.

긍정주의자들은 외부의 위협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속 부정성에 대해 온종일 경계한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위협은 현실 속에 있기에 자신의 내면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행동을 취해야만 대응할 수 있다.
애초에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초장에 접어둔지 오래이다.


카 미오리: ··· 세라라고 했었나? 너는 동의하는건가?

: 뭘 동의해?

카 미오리: 나와 둘이 조사하는 것 말이다. 불만은 없는건가?

: 마음대로 해. 상관 없으니깐.

카 미오리: 알겠다. 그럼 각자 흩어질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감독과 나, 댄서와 호텔리어로 두 팀 씩 나눠 잠시 흩어져 조사하기로 한다.


···
그저 아무말도 없이 잔디바닥을 걷는다.

(쿵 쿵 쿵 쿵 쿵...)

감독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유리벽을 두드린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지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드리는 소리는 잦아들고, 바스락 거리는 소리 이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단 걸어야하니 걷고 있고, 조사를 해야하니 조사를 하고 있다.


카 미오리: ···

: ···


아까와는 너무나 다른 적막함과 침묵에 이질감을 느낀다.
이 정도의 적막은 익숙해진지 오래 됐는데도 갑작스럽게 이질감을 느낀 것이다.
이 적막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더욱 더 아파지는 건 싫으니 말이다.


: 1바퀴 다 돌았네.

카 미오리: 역시나 큰 수확은 없었다. 유리벽에도 이상은 없다.


그때 가벼운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의 머리를 식혀준다.
딱 1바퀴 돌았을 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산들바람이라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다.


카 미오리: 이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 굳이 그런 걸 생각 할 필요가 있나?

카 미오리: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바람이 생성 될 구실이 없다. 야외의 온도 차이가 심해 저기압과 공기압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 그럼 인공적으로 만드는 거겠지.

카 미오리: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이 넓은 공간 전체에 바람이 불게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따른다.

: ···

카 미오리: 무시로 일관하는 것인가?

: ···


괜히 맞장구를 친 것 같다.
대답 할 것은 대답하고 무시 할 건 무시하는 것이 피곤하지 않게 사는 방법 중 하나이다.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가볍게 감독의 말을 무시한다.


카하시 아리이치: 야! 일로 좀 와 봐!

즈마키 하로: 여러분! 잠시 와 주세요!

 
본관 쪽에서 댄서와 호텔리어가 소리치는 것이 들린다.
 
 
카 미오리: 무언가를 발견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 이번에는 수확이 있을지 모르겠네.
 
 
나와 감독은 잠시 조사를 멈추고 댄서와 호텔리어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카 미오리: 무언가 발견한 것이 있는가?
 
카하시 아리이치: 다른 것보다 수상해 보이는게 있어서 따라와 봐.
 
즈마키 하로: 저희가 조사해보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나서...
 
카하시 아리이치: 난 하고 싶어도 못해. 애초에 별로 하고 싶지도 않지만. 바로 이거야.
 

 댄서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 사다리? 저게 왜?


본관의 옆면에 있는 안전망 사다리가 옥상을 향하고 있다.
호텔리어와 댄서가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 것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카하시 아리이치: 아니 저런 사다리가 있으면 뭔가 올라가봐야 할 것 같지 않냐? 뭔가 있을 것 같잖아. 파밍 참아?

카 미오리: 이건 게임이나 영화가 아니다. 어찌됐든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 올라가서 조사하는 것이 좋다.
 
 
(깡..깡...깡깡)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중에 누군가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야기 하던 소리가 침묵으로 변하고 나와 다른 이들까지 위를 올려다본다.

검은색 상하의에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정확히 나지는 않지만 재능이 행운, 아니 불운이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카하시 아리이치: 뭐야 아코, 너가 왜 거기서 나오냐?

아코 료타: ···


안전망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던 불운과 굉장히 뻘줌하게 맞이했다.
불운은 어째선지 어떠한 대답을 하지 않고 우리를 눈으로 훑어 볼 뿐이었다.


즈마키 하로: 일단 바닥에 내려오시고 얘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게 좀 더 편할 것 같아요.

아코 료타: ··· 그렇게 하지...


불운은 안전망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 우리를 내려다본다.
잠시 불운이 무슨 말을 할 지 기다리고 있었다.


카하시 아리이치: ··· 너 뭐 할 말 없냐?

아코 료타: 뭐가 말이지..?

카하시 아리이치: 뭐긴 뭐야. 올라가서 뭐했는지 말이야. 뭐 발견한게 있는지 아님 뭔가 이상이 있는지.

아코 료타: 내가 그걸 왜 말해 줘야하지..?

카하시 아리이치: 왜냐니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게 서로에게 좋으니깐.

아코 료타: ··· 나에게 좋을 건 없는데...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봐...


그렇게 말하며 불운은 우리를 제쳐 본관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카 미오리: 지금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가?

아코 료타: ···


불운이 발길을 멈추며 우리의 말을 경청하는 듯 하다.


즈마키 하로: 주머니에요? 딱히 뭔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데요?

카 미오리: 감독의 눈은 못 속인다.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코 료타: ···


불운은 감독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제 갈 길을 떠난다.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고집의 의미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다르다.
무시라는 감정은 고집의 감정과는 달리, 자기 스스로도 쉽게 알아채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특성도 지니고 있다.
즉, 자기 스스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는데도, 가까운 지인이나 친구 등의 태도가 전과 다르게 어쩐지 매우 냉랭하여,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동안 상대를 이래저래 무시한 자신의 태도를 반추해 봄으로써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등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러한 유형의 감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 불운은 자신에게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카하시 아리이치: 아오 시팔 저 새끼 뭐냐. 사람 말이 좆으로 보이나.

카 미오리: 아직까지 협조 할 생각 따위는 없어보인다. 그냥 저렇다고 받아들이고 우리도 관심을 안 주면 된다.


감독의 말대로 불운은 우리와 협조 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누구 하나가 튀지 않고 하나의 다른 완성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협력과 협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협조하는 건 생각보다 꽤나 힘든 일이다.
에너지도 많이 들고 어두운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다 내 맘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와 생각이 같고 내 맘 같고, 내 생각과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협동하면서 한 번쯤은 느껴볼 것이다.
그럴 때 저 사람은 왜 저렇지? 가 아니라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구나라는 시선으로 바라봐야한다.


: 불운은 내버려두고 이게 더 중요할 것 같은데 내가 한 번 올라가봐도 되려나?

카 미오리: 원한다면 그래도 된다.

즈마키 하로: 사다리 타시게요?

: 그래. 딱히 무섭지는 않거든.

카하시 아리이치: 야 그래도 조심해서 올라가라. 너까지 다치면 우리 욕 존나 처먹어.

: ···


나는 조심히 안전망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본관의 옥상으로 향한다.
올라갈 때마다 기분 나쁜 삐걱 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카하시 아리이치: 와 쟤는 진짜 안 무섭나? 깡따구가 미쳤네.

즈마키 하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설마 떨어지시는 건 아니겠죠?

카 미오리: 재수 없는 소리는 속으로만 하도록.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본관 건물 옥상에 도착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앞에 있는 볼록하게 튀어나온 구조물이다.
 
 
: 도서관 창문인가? 잘 안 보여.
 
 
발을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저 구조물은 도서관의 원형 천장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위치도 도서관에 딱 걸맞는 위치이니 말이다.
그 이외에는 딱히 볼 만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옥상에 생각보다 발을 디딜 여유 공간이 충분하지 않기에 조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어떻게 떨어지든 최소 경상이다.
분명히 크게 다칠 것이다.
하지만...
 
 
: ···
 
 
나는 무리해서 건물 천장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말이다.
 
 
카하시 아리이치: 어어 점마 뭐하냐. 너무 위험한데?
 
카 미오리: 무언가를 발견 한 것 같다. 
 
즈마키 하로: 세라 씨! 그쯤하고 내려오셔도 돼요! 무리하지 마세요!
 
: ···
 
 
난 안절부절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건물의 건너편까지 넘어간다.
다행히 넘어지거나 발목을 접질러 떨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 ··· 뭐야 이거?
 
 
다른 것들은 멀쩡한데 타일 중 딱 1개만이 불규칙한 균열을 보여준다.
 
 
: 생각보다 좁네...
 
 
균열의 폭은 검지와 중지, 즉 손가락 2개 정도만 들어 갈 수 있을 정도이다.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닿거나 잡히는 것은 없다.
손가락을 빼내는 과정에서 콘크리트에 마찰이 가해져 미상의 찰과상이 남는다.
 
타일의 수축으로 인하여 생긴 균열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1개에만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이상하다.
누군가가 고의로 타일을 부수거나 억지로 균열의 크기를 늘려, 무언가를 꺼냈다거나 무언가를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아까의 불운이 이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 일 수도 있다.
 
 
카하시 아리이치: 야! 뭐 없으면 빨리 내려와! 어디까지 가는거야!
 
카 미오리: 무언가 특이사항은 없는가?
 
: ··· 어 딱히 없어.
 
 
나는 발견한 것을 다른이들에게 공유하지 않는다.
정보를 공유해야 신뢰를 쌓을 수 있고, 소통을 활성화하고, 올바른 결정을 돕고 같은 이야기는 여럿 들어왔지만 이것을 공유하는 것은 내 자유이다.
무엇을 공유할지, 무엇을 보호할지에 대한 분별력은 나에게 있다.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고 나서 공유를 해도 전혀 늦지 않다.
 

즈마키 하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오세요!
 
: ···

 
나는 내가 걸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 내가 이 길을 이렇게 빨리 왔었다고?


분명 같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아까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길이 길게 느껴진다.
천천히 한 보 한 보 나아가 별다른 위험 없이 안전망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다.
다른이들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카하시 아리이치: 야 너 어쩌려고 거기까지 갔냐? 떨어지면 너 뒤지는 거였어.

: 떨어지면 안타까운 거지 뭐.

카하시 아리이치: 안타까운 거 이지랄. 너 오른손에 상처는 또 뭐야?

: 돌아오는 길에 살짝 긁힌거야. 신경 쓰지마.
 
카하시 아리이치: 그래 너 정도면 긁힌 것도 아니지. 내 오른손을 봐 시팔! 
 
 
댄서는 조심스럽게 본인의 오른팔을 들어 멍든 자신의 오른손을 보여준다.
 
 
: ···
 
 
나는 애써 댄서의 말을 무시한다.
내가 갑작스럽게 벌인 일에 대한 행동을 변명하며 싸우고 싶지 않다.
내 손에 상처가 생긴 것도 이러한 말을 듣는 것도 다 내가 자처한 일이니 말이다.


즈마키 하로: 그래도 큰일은 없어서 다행이네요.

카 미오리: 이제 더 이상 조사 할 것은 없는 것인가?

즈마키 하로: 네. 다른 곳은 이상한 게 없었어요. 조경된 풀이나 벤치에도 문제점은 없었고요.

카하시 아리이치: 그럼 야외는 이제 끝인가?

카 미오리: 유리벽 쪽에도 이상한 것은 없었으니 더 이상 조사 할 것은 없다.
 
카하시 아리이치: 그렇다는 의미는?
 
 
댄서는 마치 듣고 싶다는 말이 있다는 듯이 말한다.
 
 
카 미오리: 야외의 조사는 이쯤에서 종료한다. 이 말을 듣고 싶은 것 맞나?
 
카하시 아리이치: 바로 그거야! 근데 이제야 끝났네. 지금 몇 시냐?

: 3시 30분이야. 거의 1시간 30분 동안 조사한거지.
 
 
나는 나의 전자 학생 수첩을 보며 말한다.


즈마키 하로: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카하시 아리이치: 야 이제 식당으로 가자. 야외 조사는 끝! 해산!


댄서는 그렇게 말하며 본관으로 향한다.


즈마키 하로: 아리이치 씨 그 전에 보건실부터 가세요!

카 미오리: 조사하느라 고생 많았다.


호텔리어와 감독도 마찬가지로 본관으로 이동하고 혼자 남게 되었다.


: ···


나는 잠시 혼자 남아 멀리 있는 유리벽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다.
나는 생각이 많다.
아니 생각이 길다.
한 가지 현상을 두고도 본능적으로 여러 개의 상황 시나리오가 출력이 된다.
그 시나리오에서 나에게 가장 도움이 될 상황을 분류해낸다.
그 생각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에 나는 그 긴 생각을 끊어낼 생각은 없다.


즈마키 하로: 세라 씨? 안 오고 뭐하세요?

: 금방 갈게.


호텔리어의 마중을 따라 나 또한 본관으로 돌아간다.
앞으로 이런 귀찮은 조사에는 별로 동행하고 싶지 않다.
시시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용히 조사만 하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알맞다.
살아가는 것은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며 타인에 대한 상처는 결국 자신에 대한 상처로 이어지게 된다,
타인의 눈빛 속에는 스스로의 모습이 늘 비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등등 여러가지 말들이 있지만 전부 나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동행인은 내가 직접 정하고 싶다.
 
 
 
-4화 完-
 

ps. 3주만에 돌아온것 치고는 분량이 많이 짧군요...
다음 편은 더욱더 빨리 찾아뵐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