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챕터 1

[챕터 1] 희망이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관 - 일상편 : 1

단 동 2024. 9. 1. 00:00

단간론파 Dan은 단간론파 본가 시리즈의 스토리 및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 주관적 해석과 재창작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으니 부디 이점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단간론파 Dan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내용 특성상 주인공 및 캐릭터들의 속마음 및 생각 등의 부분에서 대본체 표기가 들어간 부분이 많습니다.
읽는데 불편함이 없길 바랍니다.



-



···
기억이란 것은 언제나 그러하였기에, 의문을 품은 적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억은 망상의 집합체이다.
감상의 합집합이기도 하며, 대상에 대한 여집합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남는 것은 기억 뿐.' 이라는 말은 어느 면에선 맞는 말이었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객관성은 받아들여지는 순간 하나의 주관성이 되어 버린다.
장면으로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표정과 말의 뜻을 오롯이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저 편할 대로, 떠오르는 대로 지껄이면 어느샌가 그것은 객관으로 포장된 주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 야 무능, 또 무슨 생각하냐?

···


생각을 깨고 들어온 것은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매일 몇 번씩 듣고 있는 이제는 지겨운 목소리 말이다.


???: 무능이라는 표현은 좀 그런가? 이번 프롬프트도 망한 기념으로 그럼 너에게 별명을 하나 지어 줄까나?

···


나는 아무 말 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 그 여성을 어쩔 수 없이 응시한다.
그 여성이 심심풀이로 나를 이용하는 것은 익숙하기에 그냥 무시하고 기다리다 보면 본인이 먼저 지루해져 떠나기 마련이었다.


???: 골리앗(Goliath)? 고임(Goim)?


그 여성은 몇 분 동안 생각하더니 2개의 이름을 말했다.
고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외국어를 공부한 적은 없어서 말이다.
골리앗은 다윗과 싸워 죽음을 맞이한 그 장군을 말하는 것인가?
나 같은 사람이랑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굳이 공통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나와 같이 '이방인'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골리앗은 일반적인 인간과 달리 약 2미터의 거구를 가진 거인이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선 골리앗은 본인들과는 다른 나라와 세게에서 온 이방인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상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네모의 세계에선 세모가 이방인이며, 세모의 세계에선 네모가 이방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원의 세계이다.
원의 세상에서, 우리는 원의 사고를 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그것을 죄라고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이 세계에서 숨을 내쉬는 것에 값을 매기지 않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물론 본인이 의료 시설에 누워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런 예외는 빼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런 예외를 전부 다 포함하면 끝이 없으니 말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원의 세상에서 원 같이 생활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그 사람이 틀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네모의 사람들은 억지로 원이라는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틀리다는 눈초리와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또 아무 말도 안 하게? 그럼 재미없단 말이야~


그 여성은 내가 자신이 하는 말을 듣지 않자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귀엽다고 느낄 수도 있는 앙탈이자 애교였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

오히려 나를 짜증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조금만 더 무시한다면 이 여성을 금방 떼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최대한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또다시 기억에 대한 생각을 더듬는다.


???: 음? 넬(Ner)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시간이 많나봐?


정장 차림에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남성이 나와 여성이 있는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깔끔한 정장과 반대되는 상당히 관리가 안 되고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깔끔한 모습이 본모습인지 아니면 관리가 안 된 모습이 본모습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내가 독심술사나 심리학자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그 남성의 말투와 행동거지에서 하나만큼은 진짜 모습임을 확신 할 수 있다.
틱틱 던져대는 어투, 듣는 사람의 기분이 나빠지는 어투...
저 남성은 우리를 하위 취급하며 깔보고 있다.
처음 본 나한테 조차도 인사 따위는 일절 하지 않으며 배려라고는 전혀 묻어 나오지 않았다.
매우 사무적이며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 뭔 아직도야.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구만.


같이 있던 여성이 넬(Ner)이라는 것과 방에 들어온 남성이 디나(Dinah) 라고 불린다는 것, 그것을 이곳에 온 지 며칠이나 된 지금 처음 알았다.
실제 이름이 넬과 디나 일 수도 있겠지만, 넬이라는 여성이 나에게 골리앗이랑 고임이라는 두 개의 별명을 붙여준 것처럼, 난 그것 또한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디나: 넬. 시간이 얼마 없어. 이제 곧이라고. 한 달도 안 남았어.

: 아니 히ㅋ...

디나: 내가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명칭으로 불러.


아니나 다를까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디나와 넬이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쓰이는 명칭 같은 것이다.
물론 무슨 뜻인지는 도저히 알 방도가 없었다.
애초에 핸드폰 같은 검색 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남성은 그렇게 말하고선 별로 흐트러지지도 않은 옷맵시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 디나, 진짜 골리앗으로 '그 일' 하는 거 맞는 거야? 다른 사람은 없어?

디나: 골리앗이라니? 저 녀석 말하는 거야?


그 남성은 나를 훑어본 다음 그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샌가 나의 별명은 골리앗이 되어 있었다.
그 별명이 싫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골리앗은 강인한 전사였으니 말이다.


: 내가 별명을 지어줬어. 골리앗으로, 어때?


그 여성은 뭐가 자랑스러운 듯 당차게 말했다.
나와 그 남성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 여성을 동시에 바라봤다.


디나: 넬... 어떻게 사람의 별명을 '유랑자'로 지을 수 있어?


디나는 넬에게 자식한테 잘못을 다그치는 어른처럼 말했다.


: 장난식으로 지어본 거야... 또 진지하게 받지 말고...


그 여성은 나한테 장난칠 때와 다르게 주눅 든 채로 말했다.
어른한테 혼나고 시무룩해진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디나: ··· 너만 그렇게 부르는 것은 상관없는데, 나중에 그분들 만날 때는 그딴 별명 쓰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 알았어? 그리고...


그 남성은 말을 하다 말고 나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 순간 달라지는 표정과 자세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성은 나를 일절 신뢰하고 있지 않다.
나는 너를 원하지 않지만 다른 높으신 분들이 너를 원하니 억지로 밀어주는 느낌이었다.


디나: 참 신기한 일이야. '그녀'가 사람을 직접 데리고 온 것은 말이지...


디나는 나를 보고 잘 들으라는 듯이 귀에 박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디나: 어쨌든 아무쪼록 잘 부탁하지. 유랑자(Goliath)여...


디나는 자신의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남은 한 손으로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어떻게 사람의 이름을 유랑자로 지을 수 있냐고 한 사람은 이제 나를 유랑자라고 부르고 있다.
아직까지도 나를 아래로 보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원의 세상에 온 네모라는 이방인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힘을 꽉 쥔 채로 그 남성과 악수를 했다.

···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악력으로 악수를 하였지만 그 남성은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정말이지 마치 로봇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디나: 네가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다만, 솔직히 말해서 넬보다는 네가 더 지금으로선 도움이 될 것 같거든.

: 야! 너.. 너 지금 내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면서..!


그 여성은 본인의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는지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강한 사람한테는 한 없이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한 없이 강한, 그런 가면을 쓴 존재였던 것이다.
사람은 모두 가면을 쓴다.
다른 이들이 가면을 쓰는 자들은 위선적이며, 이중인격적이라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따져보자면 가면을 쓰는 것 자체는 잘못 된 것이 아니다.

진실되고 진솔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녀...
나를 지옥 같은 곳에서 구원해 준 그녀...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도록 해준 그녀...
어떠한 능력도 없는 나를 '초고교급'으로 만들어준다고 한 그녀...



심판의 날은 언젠가 반드시 도래한다.
 
 
 

단간론파 Dan
<챕터 1>
희망이라는 이름의 움직이는 관

 
 
 
[살인 학급 생활 1일 차]

···
여기가 어디더라?
잠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머리를 손으로 부여잡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살인 학급 생활이 시작된 이후, 체육관에서 나간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외유내강(外柔內剛).
겉은 부드럽고 순해 보이지만 속은 곧고 굳센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나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상황을 잊고 싶어, 부정하고 싶어 겉으로는 남들에게 멀쩡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끝까지 냉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면의 실상은 너덜너덜 해진 채 개인실로 들어와 침대에 바로 몸을 눕힌 바로 나 말이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이 매우 고통스러우며 나 자신이 매우 한심하다.
다른 이가 징징거리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른 분들은 과연 어떠실까?
나와 같이 현실을 부정하고 계실까? 아니면 어떻게든 이 게임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실까?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에 이상한 상상만 할수록 의심만 커지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선 나를 포함한 모두가 위험인물이다.
조금은 독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정신을 차리고 개인실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선 천천히,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 침착하게 기억의 파편들을 되짚어본다.



지타 유토: ··· 그럼 저희... 이쯤에서 다들 돌아갈까요?


모노젠틀이 퇴장한 이후에 매우 어색해진 상황에 내가 처음으로 운을 띄운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누군가가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이도 저도 아닌 결과가 나와버리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다면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이다.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색한 사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좋은 상황일 수도 있다.
다른이들에게 간섭 받지 않고 혼자 지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나오 소오타: 맞습니다. 여기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일단 본관으로 돌아가서... 그.. 어...
 
이메 미치카: 음 재미없어~ 왜 다들 조용한건데~

 
기나오는 아직도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은 듯 했다.
본인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 잡혀 계신 듯 하다.
하지만 마음과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 했다.
살인을 강요당하고 본인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이런 공간에서 단시간만에 대처법을 알아내는 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자이메는 아직 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라고 평가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눈치 없고 모자라 보이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
 
 
아코 료타: ···
 
즈마키 하로: 아코 님? 어디 가세요?
 
 
아코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기 싫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체육관의 정문 쪽으로 향했다.
 
 
아코 료타: ···  여기에 있을 이유가 있나..?
 
 
그런 나지막한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아코는 혼자 체육관 밖으로 향했다.
 
 
이코 하야오: 잠깐 아코~ 잠시만 멈춰줄래~?
 
아코 료타: ···
 
 
아이코가 아코를 불러세우자 아코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이코 하야오: 아코, 너는 너무 무색무취야... 딱히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으니깐 네가 어떤 향과 색을 지닌 사람인지, 네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난 알 방도가 없어. 어쩌면 자신의 색과 향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 물론 너도 잘 모를거야. 기억이 소실 됐다고 하니깐 혼란스러운 건 다름 아닌 너겠지.
 
아코 료타: ···
 
 
아코는 완전히 고개를 돌려 아이코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집중하며 경청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듣는 척만 하는지는 나로선 알 수 없다.
 
 
이코 하야오: 난 관심, 사랑 같은 것이 있어야 그 사람이 지닌 향과 색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 나를 향한 다정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내가 지닌 향과 색을 알 수 있겠지. 내가 지닌 색이 곱거나 아름답지 않고, 심지어 약간 불쾌 할 수도 있어.
 
 
아이코는 평소의 늘어지는 말투가 아닌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메 미치카: 너무 갑작스러운...
 
다요시 미네로: 정숙.
 
 
타다요시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이코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타다요시에게서 뭔가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이코 하야오: 그러니깐 단독행동을 하는 것도 너만의 색이 될 수 있겠지~ 근데 그것보단 다른이들과 지내며 너만의 향과 색을 찾았으면 해~
 
아코 료타: ··· 
 
 
아이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코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뒤를 돌아 곧바로 체육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카 미오리: 잠깐 기다리도록 아코 료타. 진짜 그냥 나가려고 하는 것인가?
 
아코 료타: ···
 
 
텐카가 아코를 불러 세우자 아코는 귀찮다는 듯이 텐카를 째려본다.
 
 
카 미오리: 과거의 기억들이 소실 되었다는 모노젠틀의 말. 사실인가?
 
아코 료타: ···
 
카 미오리: 아까의 반응도 그러하고 지금도 침묵한다는 것은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
 
아코 료타: ···
 
카 미오리: 모노젠틀이 너의 기억이 소실됐다고 직접 언급한 것은 아코 네가 이 상황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너는 본인이 여기에 오기 전의 기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누구한테도 그 사실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본인이 이미 직시하고 있던 사실인데 말이다.
 
아코 료타: ···
 
카 미오리: 기억이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아코 네가 가장 의심스럽다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코 료타: ···
 
 
아코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우리는 보통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한다.
적절한 대답을 할 때도 있고 동문서답을 할 때도 있다.
어쨌든 상대의 말에 대꾸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침묵은 상대방의 말이 얼토당토않다던지, 내가 원하는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침묵.
어쩌고 저쩌고 따지고 불평하고 사정하는 것보다 때론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침묵이다.
 
아주 잠시 동안 짧은 침묵이 오갔다.
마치 그 누구도 숨을 쉬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금의 침묵은 무엇이라고 정의 할 수 있는가?
바로 '감정의 소용돌이를 가라앉히는 고요함'이다.
관계에서 침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다.
감정의 기복이 생길 때다.
생각하지 못한 논쟁이 점화되거나, 서로의 욕구가 대치할 때. 이런 순간에 말을 멈추고 고요함을 선택할 필요하다.  
 
감정에 휘말린 채로는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
서로 상처 주는 말들만 오갈 뿐, 실질적 해법은 나오지 않는다.
잠시 숨을 고르며 누구 하나 먼저 차분히 침묵하는 것이다.
이때의 침묵은 문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명료한 자기 인식과 통찰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과정 자체가 고도의 자기 절제력을 요구한다.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문제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된다.
 
 "화가 날 때는 10초만 참아라. 그럼 그 파도는 지나갈 것이다." 침묵이 감정을 억누르라는 뜻은 아니다.
잠시 물러서서 그것을 지켜보며, 휩쓸리지 말라는 의미다.
 
누군가와 말다툼하게 된다면, 먼저 깊은 침묵 속에 머물러 봐야 한다.
분노와 불안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되, 그것에 사로잡히면 안된다.
 
 
아코 료타: 기억은 간직 할 가치가 있는 것만 간직해... 간직 할 가치 따위 없는 기억을 왜 간직해야 하는건데...
 

(끼익- 쾅!)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아코가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카하시 아리이치: 저 새끼 뭐라냐, 간직 할 가치? 지랄하고 있네. 저 정도면 병이야 병.
 
카 미오리: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주제다.
 
즈오 미즈키: 쟤는 왜 계속 혼자 행동하는 거야? 그래서 뭐가 좋은데?
 
이메 미치카: 이런 상황에서 누굴 믿어~ 가족도 못 믿지. 난 이해해~
 
다요시 미네로: 매우 간난신고 하다고 할 수 있소.
 
 
···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16명 전원이 처음 모였을 때보다 훨씬 어색해졌다.
 

나즈마 마이리: 그 일단 다들 좀 움직일까..? 뭔가... 그... 아우 어색해 미치겠네.
 
이메 미치카: 헐~ 이 분위기 뭐야? 완전 냉동고가 따로 없네~
 
 
자이메가 분위기를 장난스럽게 풀어내려고 시도했지만 딱히 큰 효력은 없었다.

 
(짝 짝!)

가미네 우타로: 자 자! 단원들 모두 움직이게! 각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많겠지만 지금은 일단 본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네.
 
즈마키 하로: 맞..맞아요! 개인실도 열렸다고 했으니깐 잠시 거기서 생각 좀 하면서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 질 수 있지 않을까요?
 
 
하로가 억지로 웃어보이며 어떻게든 어색한 상황을 풀어보려고 한다.


: 과연 이게 맞는걸까?

나오 소오타:.. 네?

야카 세토: 그..그게 무슨 의미인거죠..?

: 말 그대로의 의미야. 우리가 저항하려고 뭉쳐봤자 모노젠틀이 억지로 와해 시킬 거고, 이미 몇 명은 살인을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카 미오리: 맞는 말이다. 모두들 무르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 모두 다른이들을 의심해야 한다.


세라와 텐카의 한마디에 또다시 분위기가 차가워진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의심이 있기에 믿음 즉 확신이 강해질 수 있다.
누군가가 내게 "의심은 나쁜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때로는 다른 사람을 지켜 줄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답할 것이다.
의심은 잘못이 아니다.
의심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 갈 수 있다.
 
인간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완벽하지 않다.
판단하고 의심하는 과정에서 놓치는 점이 있을 수도, 결과에 따라 후회나 미련이 남을 수도 있다.
오랜 시간 숙고한다면 좀 더 완벽에 가까운 결정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보통 세상이란 놈은 참 성미가 급하다.
충분히 생각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타인의 조언에 기대 어떤 결정을 내리면놓친 점을 발견하거나 후회가 찾아올 때 그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기 쉽다.
원망은 믿음에 균열을 내고 다툼의 씨앗이 되며, 나아가 한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저 조언을 듣고 믿었을 뿐인데, 사람 하나가 영영 떠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너 때문" 이라고 말하기는 참 쉽다.
"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
"네 말대로 했다가 꼴이 이게 뭐냐."
이런 식의 결말은 참 쉽고 흔하다.
하지만... 그 뒤에 무엇이 남겠는가?
 
애매모호한 약속근거 없는 믿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현실은 대개 무(無) 혹 마이너스로 끝난다.
그렇기에 다른 이를 의심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가 심어지게 된 것이다.
어떤 것을 해도 무로 끝나는데 누가 그런 일을 하겠는가.
 
 
카 미오리: '살인을 하지 맙시다' 같은 허울뿐인 행동은 필요 없다.

나즈마 마이리: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

카하시 아리이치: 맞아. 넌 뭐 뾰족한 수가 있긴 한 거야?

카 미오리: 나라고 뾰족한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임시방편으로 예방 차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즈마키 하로: 정말요? 그럼 당장 얘기를..

카 미오리: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다.

야카 세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카 미오리: 정확히는 이르다는 뜻이다.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사람들과 한 번에 의견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지금보다는 토마를 포함한 전원이 어느 정도 완만한 관계를 맺었을 때 이야기하자는 뜻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 상황에선 모두와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한 명이라도 빈자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
 
 
타 하야토: 완만한 관계를 맺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잘도 나오는군.
 
카 미오리: 무슨 문제 있나?
 
타 하야토: 문제? 당연히 있지. 지금 상황이 안 되나 본데, 지금은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살인 학급 생활이야. 살인을 강요받고 있는 거라고. 네가 말했듯이 몇몇은 이미 살인을 계획 할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와 신뢰 관계를 쌓고 완만한 관계로 남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비즈니스 관계로 아무 감정 없이 돕는 거라면 모를까, 그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데? 그러다가 자신이 제일 믿던 사람한테 배신당하고 제일 먼저 죽고 후회하는 거야. 알아?
 
카 미오리: 뭔가 이상하다.
 
타 하야토: 이상하다니 무엇을 말하는 거지?
 
카 미오리: 그렇게 까지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신하며 각자도생을 갈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마치 무언가에 의하여 신뢰를 잃어버린 그런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엄청 불안해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타 하야토: 나에 대해 뭔가를 아는 듯이 심각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난 그딴 우스개로 소비 될 생각 없으니 네 마음대로 생각해.
 
(끼익- 쾅!)
 
그렇게 말하며 쇼타 또한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쇼타가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이들의 말을 반박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안감의 요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평소와 다른 상황, 내 마음에 대한 불확신, 무의식의 지령에 따르지 않기, 과도한 변동성,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 타인의 말과 행동, 내 말과 행동의 파장에 대한 불안 등등...
예시로 든 모든 것들이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불안감이라는 바다에 배가 가라앉아 절망해 버리지만 소수의 사람은 어떻게든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필사적으로 막아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아버릴 운명일 테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살기 위해 필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죽지 않고 살아남고 싶다는 의지가 강한 것이다.
아마 쇼타 또한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세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이었을 것이다.
 
 
이메 미치카: 이걸로 13명 밖에 안 남았네~
 
카하시 아리이치: 저 둘은 거르는 걸로 하자 답이 없어.
 
: 하, 그럼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어때? 할 말은 끝났잖아?
 
이코 하야오: 맞아 일단은 개인실이 개방됐다고 하니깐 개인실로 한 번 가보자고~

나오 소오타: 식당도 있었으니깐 개인실 조사 이후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하면 되겠네요.

즈마키 하로: 좋아요. 그럼 일단 본관으로 돌아가죠.


그렇게 상황이 어느정도 일단락되고 우리 13명은 체육관 밖으로 한 두 명씩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는 동안 속마음으로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개인실, 1층, 지금 이 바깥을 감싸고 있는 원에 대한 것, 전자학생수첩에 대한 세부적인 조사.
간단히 정리된 것은 이 정도이다.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쉬운 일도 다양한 관계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곤 한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겠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매우 다양한 정보와 복잡한 관계구조에 노출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느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면 머뭇거리고 깊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되어 행동의 제약이 생기는 일이 늘어나게 된다.

조금은 간단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힘을 도와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그거 하나뿐이다.
누군가는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어리석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맹인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살인 학급 생활이고 그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지타 유토: 이나즈마 씨? 안 나오세요?
 
 
모든 사람이 체육관 밖으로 나왔지만 이나즈마만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즈마 마이리: 어? 어 나올게 잠시만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선 이나즈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체육관에서 나왔다.
오른손에 끼고 있던 장갑은 사라져 있었고, 무언가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선 아무일 없다는 듯이 나왔다.


지타 유토: 아까 뭘 하고 계셨던 거예요?

나즈마 마이리: 모노젠틀이 터진 자리의 강소흔이랑 파편 개체들을 좀 살펴보고 나왔어.
 
 
그렇게 말하며 이나즈마는 바지 주머니에서 철조각과 불에 탄 구리 전선들을 보여줬다.
 
 
지타 유토: 그런 걸 챙겨서 쓸 일이 있을까요?
 
나즈마 마이리: 모노젠틀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대강 추측 할 수 있잖아. 좀 더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이 파편은 스테인리스강이야. 
 
 
아니즈마는 본인의 오른손으로 파편을 조심스럽게 파악하듯 만지며 말했다.
 
 
지타 유토: 그런 조그마한 파편을 가지고 그걸 알 수가 있나요?
 
나즈마 마이리: 정확히는 '스테인리스강 오스테나이트계'라고 부르는데, 모노젠틀 같은 AI 즉, 기계를 만들 때는 보통 스테인리스강을 많이 써. 가격이 저렴하기고 하고 가공 하기가 쉽거든. 내가 하도 많이 보고 만져봐서 딱 봐도 알지!
 
 
이나즈마는 본인의 지식을 뽐낸 것이 자랑스러웠는지 으쓱대며 말했다.
초고교급 수리공 답게 이런 면에서는 꽤나 박식한 모습이다.


이코 하야오: 둘이 무슨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는 걸까나~?


아이코가 나와 이나즈마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우리 쪽으로 귀를 기울인다.


지타 유토: 이나즈마 씨가..

나즈마 마이리: 아니야,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어


내 말을 끊고 이나즈마가 대신 대답했다.
뭔가 들키면 안된다는 듯이 말이다.
어느샌가 파편들은 주머니에 넣은 듯 손에 쥐어져 있지 않았다.


이코 하야오: 흠~ 그래? 뭐 알겠어, 그런 거구나~?


아이코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고 앞으로 걸아갔다.
아이코가 조금씩 우리와 멀어지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타 유토: 왜 막으신거에요?
 
나즈마 마이리: 애들한테 말하기에는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니고 아이코 성격이면 다른 애들한테 무조건 말 할 것 같아서 그래.
 
 
걸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즈마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지만 조금은 비약했다.
 
 
지타 유토: 언젠간 확실히 말 하실거죠?
 
나즈마 마이리: 당연히 말 해야지. 뭔가를 확실히 더 알아낸 뒤에 말이야. 뒤처지면 안 되니깐 빨리 가자!
 
 
이나즈마는 자신의 오른손에 다시 장갑을 낀 채 나를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나도 뒤처질 수 없으니 다른 이들과 보폭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동안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잔디를 밟는 수많은 소리만 귀에 들어오며 침묵만이 유지됐다.
말하기는 정말 쉽다. 그냥 내뱉으면 된다.
말 한마디 던지는 게 이렇게나 쉬운 세상인데, 말하고 싶은데 안 하고 참는 것은 참 희소성 가득한 영역이다.
내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는 이유는 나의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자기 에너지를 지킬 줄 알면서 건강한 사람과 대화 할 줄 알고, 매사에 사리 분별이 뛰어난 사람이 앞으로 현대사회에서 더 큰 대우를 받는다.
침묵은 겸손을 동반하며, 더 숙이면서 내면은 깊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침묵의 이유이지, 다른 사람들의 침묵 의미까지 대변하지는 않는다.
침묵은 그럼 어디서 올까?
침묵은 보통 거리를 두는 적당한 무심함에서 온다.
친구나 가족 등 서로가 막역한 관계에서는 사실 침묵을 지키기가 마냥 쉽지 않다.
내가 편한 관계에서는 굳이 애써 침묵할 필요는 없다.
보통 거리를 둔다는 게 냉정하거나, 매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적정한 선을 지키는 이 무심함이 진짜 건강함이다. 

그렇다고 침묵을 싫어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시답잖은 생각은 그만두고 다른 것으로 주제를 돌려야겠다.
도대체 이런 공간은 어떻게 만들 것일까?
인공 하늘, 인공 구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그래픽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을 것 같다.
요즘 기술이 많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상용화가 됐을 줄은...
이런 시설을 광범위하게 모든 면을 감싸도록 만들려면 매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을 것이다.


나오 소오타: 저기 혹시 여러분들? 여러분들에게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들어온 것은 기나오였다.


나즈마 마이리: 뭔데 기나오 군?

나오 소오타: 혹시 토마 씨의 간호를 제가 맡아도 괜찮겠습니까?

즈마키 하로: 뭐 상관없긴 한데 그건 왜요?
 
다요시 미네로: 소인과 귀공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단연 토마 귀공이라고 할 수 있소. 그런 발산개세한 토마 귀공이 쓰러진 지금 그 공석을 채울 인재가 없소.

지타 유토: 혹여나 모노젠틀이 갑자기 돌변해서 저희를 죽이려고 한다면 그때 저희를 지켜 줄 수 있는게 토마 님입니다.
 
이메 미치카: 타다요시도 있잖아~
 
다요시 미네로: 소인이 사람을 지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소. 일반적인 사람도 아닌 기계를 소인이 오랫동안 막을 수는 없소... 이런 박지약행이라 미안하오...
 
가미네 우타로: 미안해 할 필요 없네. 오히려 인간적이어서 보기 좋네.
 
즈오 미즈키: 근데 그 박.. 뭐? 어려운 한자 좀 그만 써. 뭐라는 거야.
 
 
미즈오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카 세토: 발산개세... 힘이 산을 뽑을 만큼 세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정도로 웅장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고, 박지약행은 의지가 약하여 어려운 일을 이겨 내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아야카 씨가 재빠르게 사자성어의 뜻풀이를 해주셨다.
이건 나도 하나 배웠다.
 
 
즈오 미즈키: 그... 기개가 뭔데?
 
 
모두가 미즈오의 말에 그녀를 바라본다.
마치 이것도 모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모르는 것이 많고 무지한 것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설령 모르는 것이 있더라도 대부분 아는척하며 넘기기 일쑤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발언은 꽤 용기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에도 사회적인 스킬이 들어가야 한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않고 둘만 있을 때 슬쩍 물어보거나, 당사자가 아닌 주변에 물어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모르는 것이 생기면 혼자 공부한 후에 정말로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 내가 모르는 부분이 전체가 아니라 여기부터 저기까지라는 객관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남에게 배우며 알게 되는 부분이 구체화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객관화의 시작점이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카하시 아리이치: 와... 너 진짜... 아무리 나라고 해도 넌 진짜 아니다. 중학교 때 학교 안 나올 때부터 알아 봤어야... 아 아! 아!!
 
즈오 미즈키: 그건 국가대표 훈련 때문에 그런 거였고, 그리고 내가 너한테 그딴 말 듣고 싶지는 않거든..?
 
 
미즈오가 아리이치의 귀를 꼬집으며 말했다.
옛날부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하니 이 정도의 관계는 이상해할 것이 없었다.
환경이 변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사이에는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었다.
흔히 말하는 남사친, 여사친의 관계 같은 느낌이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 둘이 초고교급이 되어 다시 재회 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야카 세토: 기개는 그... 어...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냥 씩씩하고 꿋꿋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즈오 미즈키: 아 그래? 땡큐.
 
 
아야카의 말이 끝나자 미즈오는 아리이치의 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카하시 아리이치: 아오... 내가 진짜... 하 씨 아파라...
 
 
아리이치는 본인의 손을 귀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나오 소오타: 어쨌든 말을 이어서 하자면 타다요시 씨랑 하지타 씨가 말했던대로 토마 씨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제가 토마 씨의 간호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 우리가 너의 무엇을 믿고 그걸 맡겨?
 
 
세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오 소오타: 아직 신뢰를 못하시는 거군요...

: 당연한 거 아니야? 너의 그런 착하다는 이미지를 이용하여 살인을 할 지 누가 알아? 너한테는 오히려 좋은 거 아냐? 살인이 일어나면 '기나오가 그랬을 리 없어' 라고 하면서 용의 선상의 뒷편으로 빠질텐데?
 
 
세라가 기나오를 강하게 압박하며 말했다.
기나오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세라는 기나오에게 마치 그렇게 착하게 살지 말라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았다.
 
착한 것은 기나오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악용될 수도 있는 단점이기도 하다.
'착하다' 누군가 이득을 얻을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착한 사람을 발견하면 귀신같이 이용해 먹고,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사람들이 그득한 것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은 기나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베풀어주는 호의를 권리로 알고 이용하려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 몇몇 어린이들이 ‘호구’라는 단어와 ‘착하다’라는 말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어느샌가 착하다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어느샌가 주관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착한 것이 더 이상 칭찬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 말이다.
 

: ···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이라.

이메 미치카: 그럼 어쩌면 좋으려나~ 뾰족한 수가 없나?

가미네 우타로: 기나오 단원과 함께 토마 단원을 간호 할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네. 감시자이자 간호인을 도맡을 보모 같은 역할 말이네.

: 대장이 맞는 말했네. 복지사를 감시할 인원은 반드시 필요해.
 
 
기나오는 그 말을 듣고는 약간 생각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말에 대한 반박이든 찬성이든 둘 중 하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오 소오타: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와 함께 토마 씨를 감시하실 분 계십니까?
 
 
기나오는 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른 인원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즈마키 하로: 그럼 저도 함께 감시할게요.


하로 씨가 곧바로 손을 들며 토마 씨의 간호에 동참하겠다고 하신다.
 
 
: 잘 할 수 있어? 장난식으로 지원 하는 건 아니지?
 
즈마키 하로: 그럼요! '초고교급의 명예'를 걸어서라도 해내 보일게요!
 
: '초고교급의 명예'라... 나한테는 없는거네?
 
즈마키 하로: 아...
 
나즈마 마이리: 에이... 어떻게 없다고 확신해, 그건 모르는 거잖아.
 
: 내가 재능이 있었다면 초청장이나 모노젠틀이 설명해줬겠지. 근데 아니잖아? 모노젠틀은 침묵으로 일관했어.
 
나즈마 마이리: 난 너를 위해 하는 말인데 꼭 그렇게 말을 해야 돼?
 
 
세라의 말 한마디에 어느정도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 싸해졌다.
싸한 느낌은 언제나 맞다.
종종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싸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과의 관계 후 결말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얌전하고도 조용히 아름답지 않게 끝나거나, 험악하고도 시끄럽게 끝나는 경우도 있다.
지금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어느 한 쪽이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좋은 관계가 되는 건 운명의 상대가 아닌 이상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선을 넘는 것'에 대한 '선'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마련이다.
특히 대화도 많이 나눠보지 않은 사이인데 상대방이 나에 관해 판단과 조언을 할 경우, 어느 정도 수위가 넘어가면 이런 생각 들게 된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저렇게 말하는 거지?"
이때의 싸한 느낌은, 한쪽만 느낄 수도, 양쪽 다 느낄 수 있다. 

강렬한 감정을 나누며 싸운 경우도 아니니, 대체로 무시한다.
근데 이 싸한 느낌을 시작으로 결국 이 관계는 원만하게 이어지기 어렵다.
만약 이어진다면, 어느 한쪽이 늘 참아야 한다.
양쪽 다 서로 선을 넘는 걸 즐기는 사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나오 소오타: 여러분 싸우지 마시고... 음?


그렇게 말하면서 기나오는 당황한 듯 두 눈을 돌린다.


나오 소오타: 잠깐 왜 저까지 포함해서 12분 밖에 안 계신 거죠?


그 말에 우리는 모두 주위를 둘러보면서 인원을 센다.
 
 
가미네 우타로: 토마, 아코, 쇼타 단원을 빼면 13명이어야 되네. 텐카, 텐카 단원은 어디간 것인가?

지타 유토: 어 진짜네요. 텐카 씨가 없어요.

가미네 우타로: 체육관에 나올 때만 해도 함께 있었는데 그 사이에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모르겠네.

야카 세토: 이미 본관으로 돌아가신 거 아닐까요?

카하시 아리이치: 그러면 무조건 이 길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지나쳐갔으면 우리가 무조건 봤을 텐데?
 
 
모두가 텐카가 사라진 것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혼란스러워할 사항은 아니다.
상황이 상황이긴 하다만 잠시 사라진 것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그저 주위를 조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사이 먼저 본관으로 간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이렇게 쓸모없는 물음표를 띄우며 혼란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


모노: 아 맞다. 여러분들에게 전달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혼란스러워 하는 우리 앞에 모노젠틀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말 그래도의 의미이다.
뿅 하고 등장했다.
 
 
즈마키 하로: 꺄악!!
 
 
다른이들이 반응하지도 못 하고 있었을 때 하로 씨가 제일 빠르게 모노젠틀에게 손을 날린다.
 
 
모노: 아니 하로 학생, 아무리 그래도 뺨을 갈기려는 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모노젠틀은 가까스로 몸을 뒤로 젖히며 하로 씨의 손을 피했다.
아마 맞았으면 그것대로 놀라웠을 것 같은데 말이다.
 
 
즈마키 하로: 어머...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저도 모르게 놀라서 그만...

즈오 미즈키: 네 비명소리 때문에 더 놀랐어!
 
이메 미치카: 맞았으면 명쾌, 상쾌, 통쾌 했을 것 같은데 까비염.
 
야카 세토: 장본인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아야카는 모노젠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만약 보복이라도 보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을 하고 계신 것 같다.
 
 
모노: 전 괜찮습니다. 하로 학생의 방어기제가 뺨 후리기 라는 거 잘 알았습니다.
 
즈마키 하로: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지타 유토: 그래서 왜 온거야, 모노젠틀.
 
 
우리가 궁금한 것은 모노젠틀이 우리를 찾아온 이유이다.
하로의 방어기제 라던가 모노젠틀과 수다 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노: 딴 길로 이야기가 새어나갔군요. 크흠... 체육관에 있는 단상 위 무대 뒤편에 후문이 존재합니다. 후문을 통하여 잔디가 없는 길로 걸어가면 더 빠르게 본관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단상 위에 후문?
그런 건 단상까지 올라갔는데도 보지 못했다.
아마 천으로 된 블라인드 커튼으로 가려져 보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그때 토마를 신경 쓰고 있었고 그 이후에는 모노젠틀이 단상에서 내려가라고 해서 아무도 알지 못한 것이다.
 

다요시 미네로: 근데 그런 정보를 알려주는 이유가 무엇이지?
 
모노: 여러분들이 텐카 학생이 어디있는지 궁금해 하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알려주는 겁니다. 학생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들어주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 아닙니까? 텐카 학생은 현재 체육관 후문을 조사 중입니다.
 
: 갑자기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뭐야?
 
모노: 이제는 친절을 베푼다고 뭐라 하시다니 이러면 저 이제 불러도 안 옵니다.
 
카하시 아리이치: 네 다음 ^완전개쩌는초첨단알파AI인데고등학생한테한손으로쳐발린깡통덩어리^
 
모노: ···
 
 
아리이치의 말에 모노젠틀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대체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하시 아리이치: 뭐 하지도 않을 거면서 나대다가 주눅 든 거 아주 꼴이 좋아. 그치?

나즈마 마이리: 너도 그러다가 어떻게 될 지 몰라. 어딘가에서 비명횡사 할 지도...
 
이메 미치카: 나는 좋았어, 내가 하고픈 말을 대신 해 줘서~ 모노젠틀 쟤는 할 말 없겠지~
 
 
아리이치가 고의적으로 이 분위기를 풀려고 장난스러운 행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나에게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생소하다.
 
 
가미네 우타로: 그럼 텐카 단원은 알아서 본관으로 돌아 올 것 같으니... 먼저 가는 것이 어떠겠는가?
 
나오 소오타: 이따 만났을 때 뭔가 발견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도록 하죠.
 
즈오 미즈키: 빨리 가자... 좀 씻게 해줘...
 
야카 세토: 생필품 같은 게 개인실에 다 구비 되어 있을까요?
 
이코 하야오: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해도 늦지 않아~
 
즈마키 하로: 일단 본관으로 가고 나서 생각할까요?

즈오 미즈키: 좋아 좋아, 빨리 가자고!


미즈오 씨가 긴 다리로 달리고 점프하면서 인공잔디를 가로질러 본관까지 뛰어간다.

 
이메 미치카: 달리기는 나도 안 지지~ 나도 간다~!
 
 
자이메도 본관 쪽으로 열심히 뛰어간다.
 
 
이코 하야오: 둘 다 조심해~ 넘어지면 안돼~
 
다요시 미네로: 혈기방장 한 것이 아까와는 다르게 소인도 힘이 나는 것 같소.
 
야카 세토: 같..같이가요..!
 
 
다른 분들도 뒤처질새라 열심히 본관 쪽으로 걸어갔다.
분위기가 전환 된 것이 훨씬 보기가 좋아졌다.
 
 
나즈마 마이리: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나아져서 다행이네.
 
지타 유토: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몇몇 이야기를 나누며 본관으로 들어와 개인실 앞까지 가게 되었다.
 
 
즈오 미즈키: 진짜 아까까지 있던 그 큰 창살이 사라졌네. 언제 치웠담.
 
이메 미치카: 마치 원래 없던 것처럼 말이야~
 
 
미즈오와 자이메가 이미 개인실 앞에 도착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던 창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기에는 지금 이 상황이 가장 부자연스럽고 이상하기에 그렇게 크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모노젠틀이라는 본 적도 없는 최첨단 AI가 살인을 강요하는 것만큼 이상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카하시 아리이치: 어디가 내 개인실이려나... 여기구만!
 
 
아리이치가 문 여러개를 간단히 살펴보더니 문 앞에 붙어있는 명찰을 보고선 문 손잡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덜컹 덜컹..!)
 
카하시 아리이치: 뭐냐? 이거 왜 안 열림?
 
 
아리이치가 복도가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손잡이를 마구잡이로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즈오 미즈키: 내 문도 안 열려. 카드키 같은 게 따로 있나봐.
 
카하시 아리이치: 모노젠틀 그 새끼 이건 알려주고 가야지. 가장 중요한 걸 안 알려주고 갔네.
 
즈오 미즈키: 모노젠틀 불러봐?
 
카하시 아리이치: 부른다고 오겠냐? 걔가 개도 아니고.
 
지타 유토: 혹시 전자 학생 수첩 가져다 대보셨나요?
 
카하시 아리이치: 전자 학생 수첩은 왜?
 
지타 유토: 모노젠틀이 전자 학생 수첩은 개인실의 카드키이기도 하다고 말했던 것 같아서...
 
카하시 아리이치: 에이 이 커다란 게 어떻게 카드키...
 
 
아리이치는 전자 학생 수첩의 뒷면을 문 옆에 있는 기기에 가져다 댔다.
 
(띠리링~♪)
 
그 순간 경쾌한 알람음과 함께 아리이치의 개인실 문이 열렸다.
 
 
카하시 아리이치: ··· 이왜진.
 
 
아리이치는 당혹함에 말을 잃었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즈마키 하로: 호텔 카드키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다요시 미네로: 문을 열려면 전자 학생 수첩을 필히 소지하고 있어야 겠소. 
 
나즈마 마이리: 왜 이런 식으로 만들었지? 그냥 플라스틱 카드키 하나 주면 되잖아. 전자 학생 수첩이 가벼운 것도 아니고 일반 패드 무게랑 비슷한데.
 
: 전자 학생 수첩을 활동 할 때 무조건 가지고 다니게 하기 위해 그런 것 같은데. 이유 같은거 물어봤자 대답도 안 해 줄 것 같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전자 학생 수첩을 잃어 버렸다간 대참사다.
개인실 배치에 관해서는 혹시 모르니 외워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오 소오타: 좋습니다. 그럼 각자 개인실을 조사하고 씻고 잠시 휴식 하신 후에, 12시 30분이 됐을 때 식당으로 모여주시길 바랍니다.
 
 
기나오는 전자 학생 수첩의 전원을 키고 화면의 시간을 보면서 말했다.


지타 유토: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나오 소오타: 참여하기 싫으시다면 굳이 참석 안 하셔도 됩니다. 강요가 아니니깐요.

야카 세토: 그럼 나머지 분들은 어떻게 할까요..?

카 미오리: 나머지라는 것이 나를 말하는 것인가?


텐카가 인기척도 없이 우리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카하시 아리이치: 으악! 깜짝이야! 넌 언제 온 거야?

카 미오리: 너희보다 조금 일찍 왔다. 나머지 라는 것은 나와, 쇼타, 아코를 말하는 거겠지?
 
야카 세토: ㄴ..네... 안 계신 분이 텐..텐카 씨랑 나머지 두..두 분 밖에는 안 계셔서...
 
 
아야카가 평소보다 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텐카에게 뭔가 압박을 느끼는 걸까?
 
 
지타 유토: 텐카 씨, 혹시 체육관 뒷문 쪽에서 뭔가 발견한 게 있으신가요?
 
카 미오리: 어떻게 알고 있는 지는 모르겠다만, 딱히 없었다. 있다고 해봤자 후문 쪽 통로에 의자들이랑 먼지가 있다 정도겠다.
 
나오 소오타: 체육관 뒷문 같은 경우는 모노젠틀이 알려줬습니다.
 
카 미오리: ? 그 녀셕이 어째서 그런 것을 알려주는 건가?
 
지타 유토: 본인의 말로는 선생이 학생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도 선생님의 역할이라고 하더군요.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말이다.
모노젠틀은 본인의 처지가 어떤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AI라 뻔뻔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본인이 마치 신뢰받는 선생인 것처럼 말했었다..
보통 모노젠틀 같은 자들이 뻔뻔하다는 것과 같은 점을 지적받으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극심한 모순이다.
 
 
카 미오리: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알려줘서 고맙다.
 
나즈마 마이리: 너도 그럼 쇼타나 아코가 어디있는지는 모르는 거지?

카 미오리: 아코는 모르겠다만 쇼타는 개인실로 들어가는 것을 내가 직접 봤다.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 바로 개인실로 들어갔다. 지금도 개인실 안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미네 우타로: 그런 정보라도 알려줘서 고맙네, 텐카 단원.

이코 하야오: 그럼 각자의 개인실을 조사 한 뒤 식당에서 보자고~

이메 미치카: 좋아 그럼 여기서 각자 해산~!

즈마키 하로: 그럼 저희 둘은 토마 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식당으로 바로 갈게요.

나오 소오타: 좀 이따 뵙시다. 여러분들.

 

···
그러고 나서 전자학생수첩을 통해 개인실에 들어온 다음에 둘러볼 기세도 없이 침대에 누워버린 거였다.
이제야 완벽히 떠올랐다.


지타 유토: 좋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조사하고 바로 식당으로 가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식당에 모이는 것은 자유지만 그래도 다같이 모이는 회의 시간에 빠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다른 분들에게까지 해를 끼칠 수는 없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편다.
그와 동시에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확인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4분...
12시 30분까지 식당에 도착한다고 치면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다.
그럼 본격적으로 개인실을 조사해 보자.
 
내 개인실은 약간 내가 쓰던 사무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남색 벽지에 나무 책상, 스탠드 조명...
내 사무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이렇게까지 구현하다니 상당히 놀라울 따름이다.
 
개인실에도 CCTV가 나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고의로 CCTV를 가릴 수는 없으니 사생활이 침해당해도 참을 수 밖에 없다.
 
사용하던 만년필, 모자 등등까지 똑같았다.
직접 그것들을 써보고 만져보기까지 한 내가 가장 잘 안다.
내가 입고 있는 상하의와 똑같은 옷들이 옷장에 몇 벌씩 걸려있다.


지타 유토: 구하기 어려운 옷은 아니니 똑같이 구매한 건가? 사이즈까지 똑같네.


자세히 보니 속옷까지 똑같았다.


지타 유토: ··· 이건 대체 어떻게...


뭔가 갑자기 기분이 싸하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나는 괜히 범행을 들켜 초조한 사람처럼 괜스레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침대 옆에 있는 벽 밑에는 배출구 같은 것이 보였다.
손잡이도 있는 걸로 봐서는 여닫을 수 있는 것 같은데 환기용으로 배치한 것인지 아니면 뭔가를 보내기 위한 트레이 용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건 별거 없었다.
평범한 화장실에 있는 그저 그런 위생품들, 평범한 매트리스 침대, 평범한 미니 냉장고 안에 있는 평범한 계란 샌드위치...
계란 샌드위치?
난 몸을 숙여 미니 냉장고에 높이를 맞추며 샌드위치를 하나 꺼냈다.

 


지타 유토: 내가 좋아하는 음식까지 들어있잖아?


난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계란샌드위치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에는 거창한 이유 같은 건 없다.


모노: 이런 건 학원장으로써 당연한 사항이지요.


모노젠틀이 갑자기 내 뒤에서 등장했다.
난 곧바로 몸을 돌려 경계 테세를 취했다.


모노: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익숙할 때가 되셨을 텐데요?

지타 유토: 너 따위한테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모노: 체육관에 있었을 때 까지만 해도 존댓말 해주셨잖습니까? 갑자기 왜 안 쓰셔주십니까? 저 서운합니다.

지타 유토: 내가 너 따위한테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 단호히 말하지, 당장 나가.

모노: 뭐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시죠.


그 말과 동시에 모노젠틀은 사라졌다.
나에 대한 흥미가 사라진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분들에게 찾아간 것일 수도 있다.


지타 유토: 이제 진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난 샌드위치를 뒤로 하고 전자학생수첩을 챙겼다.
개인실을 나가기 위해 손잡이를 잡았던 그때, 괜스레 뭔가 잊어 먹은 것은 없나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처음 오고 처음 보는 방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익숙했다.
 
익숙한 것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낯설고, 검증되지 않은 그런 것보다는 눈에 익고, 손에 익고, 입맛에 익숙한 것은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주기 마련이다.
익숙한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금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개인실이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곤 한다.
부모님의 잔소리, 친구의 농담, 차려진 밥상. 평소에는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사라지고 난 후 그제야 그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린다.
고맙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더 할 걸 후회가 된다.
우리 삶에도 분명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처럼 제 역할을 다하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 지낼 이 개인실을 눈에 담았다.
나가기 직전에 옷과 머리를 가다듬고 손잡이를 잡고 개인실의 문을 연다.
익숙함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갈 차례다.



-1화 完-